7년의 밤에서도 이미 한번 접한 바 있지만 정유정 작가의 책은 절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요즘 작가의 책이라기에는 추상적인 비유의 표현이 무척 많아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읽어야만 글에서 이야기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다. 다른 책에 비해 두 배 정도의 집중력을 요하게 된다.

간간히 유진이 어머니의 일기장을 열어보게 되면서 어머니 시점에서 쓰여진 

문장들의 나열을 제외하면 이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1인칭시점으로

진행된다. 이 작가의 전작 7년의 밤이나 28에 비해서는 시점이 대단히 단순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유진의 알고싶지 않은 저 밑바닥

감정선까지 꼭 내가 겪고 있는 것처럼 실감나게 느낄수밖에 없다.

다 읽고 난 뒤에 밀려오는 감정의 후폭풍도 상당히 거세다. 글에서 유진, 해진이

절박하게 이건 악몽이야 하고 바랐던 것처럼 나도 한바탕 악몽을 꾼것처럼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소설일 뿐이지만 소설속에서도 악몽일뿐이었다 믿고

싶을 지경이다. 때문에 이 책은 호불호가 많이 갈릴것 같다. 읽고 나서 절대

유쾌할 스토리가 아니고, 읽는 내내 가슴이 불쾌하게 두근거리며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책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의 두려움이다.

유진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기를, 그리고 혹시라도

내안에 저 아이와 같은 광기가 도사려 있는 건 아니겠지하는 그런 생각. 


여튼, 그런 이유로 한번 책을 펴들면 뒷내용이 궁금해서 절대 덮을 수가 없으므로, 

취향이 아니라면 읽지 않는게 나을 것 같다. 

하지만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고, 

대단히 몰입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는 추천하고 싶다.

실제로 7년의 밤에 이어 2018년 영화로도 개봉될 예정이라 하고, 

NBC 투나잇쇼에서도 '7월 휴가지에서 읽어 볼 만한 '섬머 북(SUMMER READS)' 

5권에도 꼽혔다. 7년의 밤은 영화를 보고 너무 실망스러워서 종의 기원은 제발

배우캐스팅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주길 바랄 뿐이다.


작가는 책을 통해 악이란 어떤 형태로 자리하고, 어떤 계기로 점화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하는가를 보여주려고 했다는데 평범한 모든 사람들이 유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책에도 나온 바 있듯 평범한 사람과 악인의 차이는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행동들을 실행할 힘이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솔직히 유진의 행동들이 너무나도

충동의 연속이고, 이해가 안되는 지점들이 많아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사이코패스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에게 악의를 품고, 살인이라는 행위를 

죄의식없이 저지르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나 프로파일러들의 입을 통해 

듣는것보다 훨씬 실감나게 와닿기는 했다. 

꼭 내가 그 살인현장을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또 나는 매우 슬펐다. 로스쿨 시험까지 합격하고 이제서야 자신의 인생의 향방을 

찾아가는 유진이 자기 손으로 제 인생을 망가뜨리는 모습이. 

소중한 사람들을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 떨궈가는 모습이. 

특히 유진의 유일한 친구이자 형제였던 해진에게까지 그럴줄이야. 

그애는 무슨 잘못이 있는가? 엄마랑 이모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수영을 

못하게 만든 죄라 하더라도 해진은 착실히 유진과 유진의 어머니까지

챙겨온 듬직한 친구였다. 차가운 바닷속에 갇혀 해진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면 지금도 참혹하고도 참담한 심정이다.


----------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가 바로 나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폭풍을 피할 항구 같은 건 없다.

도착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폭풍의 시간은 암흑의 시간이고, 나는 무방비 상태로

거기에 던져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과정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때는 기분이 상했지만 이제 와선 그저 궁금하다. 

나는 유진에게 이로운 존재일까, 해로운 존재일까.


-유진의 심장을 뛰게 하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지 몰라 겁이 난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생의 3분의1을 몽상하는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엄마 사랑해요." 작고 나직한 소리였다. 둥지에 홀로 남은 새끼새의 울음처럼 

분명한 의도가 읽혔다. '엄마, 사랑해요'가 아니라 '엄마, 나를 버리지 마세요.'




설정

트랙백

댓글